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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되는데 걸리는 시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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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조회 741회 댓글 0건 작성일 20-11-26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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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신춘문예의 시즌이 돌아왔습니다.
투고할 원고를 정리하다가
어디 보내기는 그렇고 버리기는 아까운 게 하나 있어 공유합니다.
재미있게 보셨으면 합니다.
PS> 코로나 와는 상관없습니다. 그 전에 썼거든요.


  피가 파랗게 됐다. 하늘보다 바다보다도 더. 마케팅 본부 전체를 대상으로 하반기 브랜드 마케팅 전략 초안을 발표하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하반기의 마케팅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가에 대해서 한창 열을 올리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에게 코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시큰하더니 진한 잉크 같은 것이 얼굴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뚝뚝. 파란 그 불길함이 아침에 세탁소에서 갓 찾아온 하얀 와이셔츠에 궤적을 남기고 회의실 바닥의 우중충한 회색 카펫을 오염시키더니, 일주일 전에 새로 산 비싼 구두까지 더럽혔다. 조용했던 회의실이 순식간에 더 조용해졌다.

  청혈증이다.

  어색한 정적을 깨뜨리며 누군가의 비명이 날아와 박혔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십여 명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불어오더니 얇디얇게 깔려있던 고요가 박살 나버렸다. 순간적으로 맨 앞에 앉아있던 본부장의 얼굴을 살폈다. 엊저녁 숙취가 가시지 않은, 퉁퉁 부은 그의 얼굴엔 복잡한 심경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파란색 피에 대한 두려움과 망쳐버린 회의에 대한 망연자실, 혀같이 부리던 부하직원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당혹감,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같은 소시민적 갈등까지.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레이저 포인터를 던져버리고 회의실을 나와 곧바로 주차장으로 뛰어갔다. 짐을 싸거나 숨을 차분히 가다듬을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누군가 보건 경찰에 신고해 버린다면 그 시간부로 바로 격리조치 될 거다. 그 후로 어떤 삶이 기다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회의실에 남아 꽥꽥 소리를 질러대는 저들은, 내가 자신들과 관련된 삶에 머무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삶 속에 머물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본부장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하반기 마케팅 전략 따위야 이제 어찌 되는 내 알 바 아니었다.

  저 회의실은 당분간 폐쇄될 것이다. 그리고 같이 있던 이들은 격리된 채 일주일 동안 보건 경찰의 추적 관찰을 받을 것이다. 일주일 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곧 풀려나겠지만, 다 의미 없는 일이다. 일주일로 알려진 잠복기는 꼭 맞는 게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유의미한 접촉 후 두 달, 석 달 있다가 발병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출현한 지 3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청혈증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언론과 정부는 계속해서 청혈증의 비밀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고 떠들어 댔지만, 피가 파랗게 변하고 발병 시 처음에 코피가 난다는 것 외에는, 어떻게 전염이 되고 구체적으로 무슨 증상이 있으며, 그리고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중에 한 달 전에 오피스텔로 찾아온 혜경이 떠올랐다. 그녀는 정확히 22개월 15일 만에 다시 그 방을 찾아왔다. 그 오피스텔은 그녀와 같이 살기 위해 마련한 것이었지만, 그녀가 나간 후로 그녀의 방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았다. 책상 같은 가구는 다 팔거나 버렸고, 자전거와 운동기구와 그 외, 쓸데없는 허섭스레기들로 가득 채워 놨다. 자기가 머물던 방의 상태를 확인한 그녀는 별수 없다는 듯이 거실 소파 위에 몸을 던졌다.

  

  “뭐야? 갑자기.”

  “나 며칠만. 갈 만한 곳이 구해지면 바로 갈 거야.”


  처음엔 짙은 화장 때문에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화장을 거의 하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거의 가부키 분장 수준의 화장으로 나타났기에 의아하긴 했다. 그래도 특별히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저 이사 날짜를 잘못 맞췄거나 아니면 그 비슷한 상황 때문에 며칠 묵을 곳이 필요했나 보다 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음 날 아침에 그녀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늦여름 아침 햇살 속에서 소파에 누워 있는 혜경의 얼굴을 보고 주저앉고 말았다. 화장이 지워진 그녀의 얼굴은 마치 누구한테 맞아 멍이라도 든 것처럼 푸르스름했다. 특히 입술은 검푸른 색이었다. 한눈에도 그녀가 청혈증에 걸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털썩 주저앉는 소리에 깨어난 그녀는 내 놀란 얼굴을 보더니 체념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일찍 일어났네.”

  “, 이거.”

  “걱정하지 마. 전염되는 건 아냐.”

  청혈증이 전염되지 않는다니. 어떻게 전염되는 건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미 정부에선 1급 전염병으로 지정했고, 이 병을 막기 위해 보건 경찰이라는 해괴한 조직까지 만들었는데. 세계에서 발병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막아낸 나라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계처럼 정확한 말투로 자근자근 말을 뱉었다.

  “전염되는 게 아냐. 잘못 알고 있는 거라고.”

  많은 제약회사와 연구소들이 청혈증에 대해서 연구 중이었다. 혜경은 그런 메이저 제약사 중 한 군데인 H제약의 신약 연구소 병리학 연구원이었다. 사실상, 그녀는 지구상에서 이 병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무슨 소리야?”

  “이건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냐. 병이 아니니까. 하지만 피가 파랗게 변하는 사람들은 점점 늘어날 거야.”

  “병이 아닌데 왜 늘어난다는 거야?”

  그녀의 말이 어쩌다 사타구니에 들어간 모래처럼 까슬거렸다. 주방으로 간 혜경은 커피를 컵에 따르며 말을 이었다. 어제 사 온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원두를 베이스로 나름대로 블랜딩한 커피를 지금 막 내린 상태였다.

  “아직도 이렇게 마시는구나. 이 집 나가고 제일 아쉬웠던 게 이 커피였는데.”

  “아니, 병이 아닌데 왜 피가 파랗게 변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거야?”

  “그거야.”

  살짝 열린 커튼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 속에서 얼굴이, 특히 입술이 퍼런 반라의 여자가 빨간 컵에 담긴 검은 색 커피를 홀짝홀짝 음미하며 마시고 있었다. 거실의 풍경은 형편없이 물감이 번진 낡은 그림처럼 충분히 괴기스러웠다.

  “그 사람들은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으니까. 병에 걸린 게 아니라 유전자에 잠복하고 있던 성질이 발현된 것뿐이야. , 그때 말도 없이 가서 미안.”

  2년 전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떠났다. 내가 집을 비운 사이, 편지 한 장만 냉장고에 붙여 두고 사라졌다. 아니, 그건 편지라고 할 수도 없는, 달랑 미안해,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써진 종이 쪼가리였었다.

  허무맹랑한 그녀의 이야기를 언제까지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캐리어와 그녀를 문밖으로 내몰고 그대로 이별을 고하려 했다. 아무리 한때 사랑했던 사이라지만, 그리고 아직 마음이 남아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되어 버린 그녀와 같이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전염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기엔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컸다. 하지만 이후 겪게 될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 성가시기에 신고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마지막 부탁은 중고차 시장까지 태워달라는 것이었다. 태워다 줬을 뿐 아니라 그녀가 탈 만한 차도 물색해 계약까지 해줬다. 차에서 내리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려 했지만, 나는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녀의 입술을 감싸고 있는 빨간 색은 오히려 그녀를 더 무섭게 만들었다. 그녀의 입술은 마치 차갑고 가늘고 붉은 뱀의 혀 같았다. 그녀는 한층 깊어진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뺨을 톡톡 두들기고는, 중고차를 몰고 사라졌다. 여전히 마지막 인사 따윈 남기지 않았다.

  그녀가 떠나고 사흘 후에 낯선 이들을 맞이해야 했다. 그들은 집 앞에서 바퀴벌레 떼 마냥 우글우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정오 씨죠?”

  “, 그런데요.”

  “보건 경찰입니다. 문 여세요.”

  짜증 담뿍 담긴 말투로 영장을 들이 밀은 그의 얼굴엔 방독면 수준의 검은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다. 이미 CCTV를 통해 그녀가 내 집에 머물렀던 것을 확인한 그들은 집을 샅샅이 뒤져 그녀가 남긴 흔적을 찾아냈다. 잠을 잤던 소파는 물론이고 코를 풀고 버린 휴지까지 수거해갔다. 보건소로 끌려간 나는 24시간 동안 각종 검사와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잠복기로 알려진 일주일 동안 집에 갇혀 지내며 매일 혈액 채취를 당했다. 일주일이 지나서도 여전히 피가 빨갛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철수했다.

  보건 경찰, 그러니까 국민 건강 특별사법경찰이 출범한 건 대략 2년 전이다. 그들은 청혈증에 대한 초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영장 없이 바로 임의 혈액 검사를 할 수 있었으며, 혈액 검사 결과 증상이 보이면 즉시 체포하여 격리조치 할 수 있다. 비슷한 조직이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 걸 보면 국가들끼리 서로 협의해서 만든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은 사복 차림으로 다니긴 했지만, 누구나 한눈에 그들이 보건 경찰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착용하고 다니는 검은색 특수 마스크는 시중에서 구하기 힘든 것이었다. 오직 보건 경찰에게만 지급되는 마스크여서 그것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차라리 제복을 입고 다니든가, 제각각의 사복을 입고 같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쓸데없이 눈에 띄었다. 공기 중으로 전파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대체 저 시커먼 마스크는 왜 쓰고 다니는지 모를 일이었다. 반가운 일 때문에 돌아다니는 이들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들의 초법적인 권한 때문에 여기저기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기본적인 인권은 무시되기 일쑤였고, 청혈자들을 범죄자처럼 연행하여 격리시켰다. 피가 파란 이들이 어디에 어떻게 격리되는지 아는 이들은 아주 극소수였다. 어디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 아니 심지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다. 여러 가지 소문만 무성했다. 어떤 소문은 그들이 인간 이하의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그들이 모두 죽었다고도 말했다. 어떤 이들은 호텔급의 격리병원에서 안전하게 잘 치료받고 있다고 했다.    

아닛, 저런 초법적 권한자가 영장을 보여줄리가요. 지속적 법률교육으로 끝내 체득한 자체검열일지는 몰라도 이미 수도 없이 집행해 어쩌면 무뎌졌을 텐데. 제한적 권한의 상징인 영장을 보여주고 바로 다음 문단에서 초법적 권한을 이야기하는 게 아주 쬐끔 신경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재밌어요. ㅎㅎ

우와 소설 연재다. 잘 읽겠습니다. ㅎㅎ

  정부나 언론은 청혈증에 대한 미스터리들이 점점 풀리고 있으며 곧 정복될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자고 일어나면 청혈증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데 결정적인 새로운 단서를 잡았다는 뉴스가 나왔다. 처음엔 다들 공포에 떨었지만, 3년이나 지나면서 점점 무감각해져 갔다. 그 병에 걸렸다고 특별히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결국엔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보건 경찰의 검은 마스크가 나타나면 그저 오늘도 누군가 끌려가는구나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저녁 회식에서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조사 중에 보건 경찰이 귀띔해 준 바에 의하면, 혜경이 쫓기는 이유가 단순한 청혈증 환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지하단체의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청혈자들의 지하단체인 그것은 이미 반사회적 단체로 규정되어 있으며 조직원 전원이 국제적으로 수배 상태라고 한다. 혜경은 청혈증과 관계된 주요 위험인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아는 혜경은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공부밖에 모르고 연구밖에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었다. 무엇이 그녀를 변화시켰을지 모르지만 내가 아는 그녀는 그런 인물이 아니었다. 보건 경찰 앞에서 웃음을 참느라 꽤 고생했다. 그들이 헛짚은 게 확실했다. 지하단체라니, 내가 아는 한, 그녀는 그런 건 개가 물어가게 내버려 둘 위인이었다. 나한테 알고 있는 걸 다 불라고 했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며칠 동안 실랑이한 끝에 변호사가 오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물 한잔 들이키고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지급정지 되기 전에 현금부터 찾아둬야 한다. 내 차로 움직이면 바로 잡힐 텐데, 다른 차를 구할 방법이 없을까. 렌터카나 공유 차량 같은 건 쉽게 꼬리를 밟힐 거다. 오늘 내일은 어찌 되겠지. 그들이 그렇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리 없으니까. 빨라야 다음 주나 돼야 차량 수배가 떨어질 거야. 일주일 동안은 타고 다니고, 다음은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

  은연중에 그녀를 믿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일주일이 잠복기라는 말도 믿었던 거 같다. 하지만 그녀도, 세상도 틀렸다. 나는 일주일이 한참 지난 지금에야 그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거울 속 내 모습은 가관, 그 자체였다. 점차 퍼렇게 변해가는 얼굴을 보니 지난여름 냉장고에 넣어둔 식빵에 핀 푸른색 곰팡이들이 생각났다. 내 피에도 내 얼굴에도 내 입술에도 곰팡이가 핀 것 같다. 내 인생에 곰팡이가 핀 건 확실했다. 이제 세상은 나를 도려내 버리려 하겠지. 음식물 쓰레기처럼 냄새나는 것들과 같이 버릴 거야. 국내 굴지의 온라인 쇼핑몰 쇼팡의 마케팅 본부 기획팀장에서 푸른곰팡이 잔뜩 낀 음식물 쓰레기 신세가 되는데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할로윈 분장 같은 끔찍한 얼굴 그대로 다닐 순 없는 노릇이었다. 혜경처럼 두꺼운 화장을 할 수도 없었기에 대신 커다란 마스크를 썼다. 신고는 이미 들어갔을 테니 당장이라도 보건 경찰이 들이닥쳐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고 은행으로 가 뭉칫돈을 찾아 가방에 구겨 넣었다. 이제 돈을 쓸 일이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당장 찾을 수 있는 현금은 다 찾았다.

     

  어디로 가지.

     

  차에 올랐지만, 내비게이션에 찍을 곳이 없었다. 누가 이런 나를 반겨 줄까. 지방에 딱히 아는 친척도 없었다. 아니, 있다손 치더라도 이런 상태의 나한테 어서 와라 해줄 리 만무했다. 부모님은 돌아 가신지는 이미 오래고, 하나 있는 동생네는 미국에 있다.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문득 안면도에서 펜션을 하는 기영이 떠올랐다.

  기영과는 경영대학원 입학식에서 처음 만났다. 본교 출신이 대부분인 석사과정생 중에 기영은 유일한 타 대학 출신이었다. 첫 학기 대표를 맡았던 나는 낯설어하는 기영을 많이 챙겨주었고, 기영은 그런 배려를 고마워했다. 그럭저럭 잘 다니던 기영은 논문 학기만 남기고, 학교를 그만뒀다. 안면도에서 펜션을 하던 아버지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랬던 기영과 5년 전에 우연히 연락이 닿았다. 인터넷으로 마케팅 본부 단합대회 장소를 물색하던 중에 기영의 펜션을 보게 된 것이다. 그 후로 가끔 휴가철이나 한가할 때 신세를 지곤 했다.

  펜션으로 가던 중, 행담도 휴게소에서 잠깐 쉬면서 차가운 커피와 빵 쪼가리로 미처 하지 못한 점심을 대신했다. 손을 닦으려 글로브박스에서 물티슈를 찾다가 못 보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스마트 폰이었다. 그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혜경이 놔두고 간 것이 분명하다. 켜보니 텔레그램 외 다른 앱은 깔려있지도 않았다. 텔레그램 주소록에 등록된 사람은 길 잃은 고래한 명뿐이었다. 또 다른 게 있나 하고 살펴보니 녹음 파일이 하나 있었다. 파일의 생성 일자는 혜경이 오피스텔을 찾아온 그 날이었다. 스마트 폰을 차에 연결해 들어 봤다.


  정오씨도 알다시피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청혈증에 대한 연구를 했었잖아. 그래서 알고 싶진 않았지만 많은 걸 알게 되어 버렸어. 예를 들면 지금 청혈증에 걸린 사람들에 대한 처우라든가, 정부의 정책 같은 거 말이야.”


  그날, 내가 잠든 동안 녹음했나 보다. 혜경은 청혈증이 얼마나 심각하게 퍼졌는지 그렇지만 왜 그게 위험하지 않은지 설명했다. 혜경은 지금 전체 인구의 5% 정도 되는 사람들이 청혈증에 걸렸다는, 그러니까 전 세계적으로 2억 남짓 되는 사람들의 피가 파랗게 변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나라별로 별도로 격리 수용되어 있는데, 그 수용소의 상황은 상당히 열악하다고 한다.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라는 거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소식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청혈증에 대한 보도는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다. 3년 전 처음 발견됐을 때는 그래도 제법 보도가 있었는데 2년쯤 전부터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다. 다만 가끔 정부의 발표를 되뇌는 수준의 보도만 있을 뿐이었다.

  정부의 발표는 요근래 점차 병을 통제해 가는 중이고 감염자는 줄고 있으며 치료제는 곧 개발될 거라는 희망적인 이야기가 전부였다. 혜경은 그것들이 말짱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청혈증은 병이 아니라는 거다. 피가 파랗게 되는 것 외에 그 어떤 증상이나 영향이 없다고 한다. 누군가 그 증상 때문에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오가 기억하는 바로는, 청혈증 출현 초기에 아이의 피를 먹으면 청혈증이 낫는다는 괴소문이 퍼져 아이 몇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아이들의 시체가 발견되고 사람들은 분노와 공포에 떨었다.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서야 그 추악한 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피를 먹은 사람들은 그래도 죽진 않았지만, 그 피를 수혈받았던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이 죽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피가 파랗게 됐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빨간 피로 돌아가려 했다. 빨간 피를 자신의 몸에 넣어 다시 피를 빨갛게 만들고 싶었던 그들은 오히려 더 차가워진 피를 가진 괴물이 되고 말았다. 그 사건 때문에 피가 파래진 사람들을 향한 시선에 공포와 혐오가 스며들게 되었다.

  청혈증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병의 증상 악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만든 상황 때문에 죽어 나갔다. 혜경은 어떤 나라에서는 군대가 피가 파란 사람들을 모두 몰살시키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들을 격리시켜 관리할 능력이 없었던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선 수만 명에 달하는 그 사람들을 죽이고 파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용없는 것이, 다음 날 다시 피가 파란 사람들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학살 명령을 내렸던 지도자의 피가 변했다는 것이다.


  “피가 파란 사람들이 처음 출현한 1년 동안 세계 곳곳은 그야말로 피의 색깔과는 무관하게 미쳐갔어. 청혈증에 대한 연구를 위해서는 실험실에서 실험 동물에게 그것이 재연되어야 했어. 그런데 무슨 방법을 써도 실험동물의 피는 전혀 파랗게 변하지 않는 거야. 실험체를 확보하지 못한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청혈증이 걸린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어. 청혈증을 치료하기 위한 치료제를 만들기 위해서 그들을 희생양 삼은 거야. 이건 전 세계 모든 연구기관이 마찬가지였어. 피가 빨간 사람들로 이루어진 연구원들은 점차 그 실험체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기 시작했어. 그들에게 연민이나 동정을 가지면 연구는 끝장이었거든. 정부와 회사는 끊임없이 실험체를 공급해줬고, 덕분에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었어. 당연히 이런 사실은 철저히 통제됐지. 내가 집을 나와야 했던 것도 연구소에서 제공한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야.”


  혜경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알아낸 중요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지구상의 전체 인간 중에 청혈증 발현 가능 유전자를 가진 인구는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그 발현이 지금 일어난 이유는 그것이 어떤 외부 자극에 의해 스위치가 켜졌기 때문인데, 그 외부 자극이 무엇인지 아직 추측만 무성할 뿐 명확히 밝혀지진 않았다.


  “이 단체에서는 내가 그 유전자의 발현을 앞당길 방법을 찾아내길 원해. 이들이 원하는 건 트리플 B, Boom of Blue Blood, 청혈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을 말하는 거야. 그걸 통해 한꺼번에 인구의 절반이 파란 피로 바꿀 수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거지. 인류 전체의 절반가량의 피가 파랗게 변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괴물이 아닌 거지. 절반을 격리할 수는 없잖아. 어쩌면 이건 인간 해방의 신호탄일지도 몰라. 어차피 인류의 절반 정도가 청혈자가 될 운명이라면 전 세계의 모든 파란 피들이 봉기해서 파란 피의 인류를 다시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내가 그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

  사실 정오씨 유전자도 검사해 봤어. 내가 가져온 물건 속에서 정오씨 머리카락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었거든. 그리고 정오씨에게 발현 유전자가 있다는 걸 확인했어. 그래서 이 메시지를 남겨둔 거야. 확실한 건 청혈자들은 이제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할 거라는 거야. 피가 빨간 이들은 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을 거야.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아마 그 날이 내일이거나, 다음 달이거나, 내년이지는 않을 거야. 많은 사람이 죽고, 죽고, 또 죽은 후에야 간신히 알아차리겠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자신들이 악마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걸 말이야.

  유전자판별법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어. 정부에서도 아마 알고 있으리라 생각해. 하지만 누구도 이 유전자검사법을 적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 인류의 반이라고, . 자신의 유전자가 파란 피로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어? 이 방법은 절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거야. 파란 피의 인간이 세상에서 모두 없어진다 하더라도 말이야.”

오오, 닌겐은 얼마나 시각적 정보에 경도되는가아~


* 캐롤 들으며 올리는 비살상 무기 얘기~




[살인보다 힘든 일]
비살상 무기는 부상을 입히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입히면서 목표인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무기의 통칭입니다. 인체는 생각보다 약합니다. 폭발, 충격, 파편에 여지없이 뚫리고 찢어지죠. 이런 목표의 안전을 지키면서 무력하게 만들거나 행동을 중지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사람마다 체격과 건강상태가 다르므로 위력을 적게 만들면 성인 남성에게는 효과가 없어지고, 강하게 만들면 여자나 아이는 맞고 부상을 입거나 사망할 수 있어서 많은 실험을 거쳐야 하는 무기입니다.
비살상 무기는 주로 경찰기관에서 민간인의 시위나 폭동을 진압하거나, 범죄자를 제압할 때 사용합니다. 80, 90년대 우리나라 주요 장소에 한참 매캐한 연기를 떠돌게 만들었던 최루탄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물론 골치 아프게 돈 안 들이고 같은 효과를 추구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아직도 인도 같은 제3세계에서는 경찰이 긴 몽둥이나 회초리를 들고 다니며, 총보다는 나은 비살상 무기라는 이유만으로 경관 개인의 자의적인 판단 아래 자유롭게 휘두른다고 하네요.



[일반적인 비살상 무기]
특이한 무기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일반적인 비살상 무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기존 무기 체계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무기를 도입하거나 사오는 건 의외로 돈이 많이 듭니다. 또 교육을 시키기도 힘들고, 비용도 추가로 발생하죠. 해서 법집행기관은 기존의 무기를 활용하거나 비슷한 비살상 무기를 우선 검토합니다.
이러한 수요를 만족시키는 게 산탄총과 유탄발사기입니다. 산탄총은 일반 총기 중에는 탄체가 큰 편이어서 각종 특수 총탄을 사용하기 쉽습니다. 유탄발사기의 경우도 20밀리미터보다는 40밀리미터 구경용 특수 탄이 더 다양합니다.
특수 총탄은 대부분 사격으로 발생된 운동 에너지를 비교적 안전한 방식으로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고무탄, 고무 산탄, 소프트 폴리머 탄, 왁스 총알, 플라스틱 총알, 질긴 섬유제 탄체에 작은 쇠구슬을 넣은 빈백 탄, 스펀지 수류탄 등은 강철이나 납보다 부드러운 재질로 인체를 후려치는 듯한 효과를 노리는 대표적인 탄종들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실제 사례에서는 실탄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특수 총탄들이 치명상을 입히는 경우가 보고되었습니다. 사고 사례는 보통 하체 위는 사격을 금지하는 규정을 어기고 가슴이나 머리를 사격했을 때 일어나며 작게는 갈비뼈 골절, 크게는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이번 홍콩 시위 때 고무탄 사격에 맞아 한 눈을 영구 실명한 사건을 떠올려보시면 이해가 가실 거예요. 사격 규정을 어기지 않아도 대상자의 체격이 작은 편이면 충격량을 견디지 못하고 크게 다치는 일도 있습니다.



[수류탄 스타일]
수류탄 하면 파괴의 종결자란 이미지가 있고, 대부분 이미지에 걸맞은 효과를 발휘하는 게 사실이지만 비살상 무기로 분류되는 수류탄도 은근히 많습니다. 고무 파편을 비산하는 일명 “스팅” 수류탄, 폭음과 압력을 퍼뜨리는 섬광탄, 최루탄 등 목표에 눈물과 콧물, 구토를 쏟게 만드는 화학제 수류탄 등 세 가지가 자주 쓰입니다.
플래시뱅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섬광탄은 1972년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이 벨기에 국적 항공사인 사베나 571편을 납치해 인질극을 벌였을 때 첫 등장했습니다. 인질범들은 귓전 바로 옆에서 총알이 대여섯 발 쏟아지는 듯한 170데시빌의 소음과 자율신경을 침범할 정도의 빛과 충격을 받아 무력화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섬광탄에 힘입어 10분 안에 테러리스트 2명을 체포하고 지도자인 알리 타하를 사살할 수 있었습니다. 승객 피해는 3명 부상, 1명 사망으로 엄청난 성공이었습니다.



[최루탄 계열]
총기가 바뀌면 총알도 바뀝니다. 최루탄은 수류탄에서도 다뤘듯 전 세계 여러 곳에서 쓰이면서 데이터가 축적된 편이라서 안전에 대한 우려도 적은 편입니다. 최근에는 페퍼볼이라는 이름으로 안에 최루탄 성분을 담은 고무공을 페인트 볼 게임용 총으로 쏘는 경우가 꽤 생겼습니다. 이처럼 페인트 볼 게임용 총은 총탄 안에 다양한 액체를 담을 수 있습니다. 특히 제거 불가 페인트, 수성 페인트 등은 군중 속 특정 표적 체포용으로도 인기가 높습니다. 미군은 2003년부터 FN303이라는 명칭의 페인트 볼 총기를 정식 운용 중이고, 중국 역시 비슷한 제품을 홍콩 시위 진압에 나선 경찰관들에게 지급했습니다.



[전기 계열]
현재는 한국 경찰들도 쓰면서 유명해진 테이저가 대표적 전기 계열 비살상 무기입니다. 테이저는 전극을 발사해 목표의 피부에 꽂은 다음, 중추 신경계에 전기 충격으로 교란을 줘서 동작을 정지시킵니다. 전력 사용 무기 중에는 안전한 편이며, 발사거리도 10.6미터까지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나라에서 사용하는 제품이 되었습니다. Taser XREP 같은 최신형 모델은 아예 산탄총에서 쏠 수 있으며, 기존 제품과 달리 20미터 이상 날아가서 사거리까지 갖췄습니다.
하지만 테이저도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술을 마셔서 취했거나 지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호흡 곤란이나 심정지를 유발하기 쉬우며, 테이저를 맞아 마비된 사람이 쓰러지면서 땅에 머리나 얼굴을 다치는 일도 종종 일어납니다.
다양한 제품군으로 고객들을 유혹하는 AXON 사는 카트리지 여섯 개를 묶어서 클레이모어처럼 지역을 지키고 있다가 84발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쇼크웨이브, 세 개를 묶어 3연발 사격이 가능한 X3, 총기 밑에 매달아 쓸 수 있는 M-26 등을 보유하였습니다. 물론 테이저가 약이 아니니 세 발 이상 맞은 사람의 건강에는 상당히 좋지 않겠죠.



[수압]
물대포는 2001년 독일에서 최초 도입한 비살상 무기입니다. 소방차와 같은 원리로 물을 내뿜어 대형 시위 등 군중이 가득한 현장을 해산하는 데 씁니다. 물에 최루액을 섞어 효과를 높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때 많이 다뤄진 사안이라서 모두 아시겠지만 수압에 밀려 잘못 넘어진 사람은 머리를 다쳐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매우 주의가 필요한 장비입니다.



[특이한 비살상 무기들]
이번 화 제목인, 게임으로 치면 드디어 보스가 나왔습니다. 이런 무기들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의 무기들 말이에요. 특이한 무기들은 일반적인 비살상 무기와 달리 첨단 기술과 관계가 깊습니다. 사용법도 전문화 교육을 받은 교관이 아닌 이상 사용하기 힘듭니다. 일반적인 비살상 무기들은 대상자들이 이젠 어느 정도 지식이 쌓여 나름의 대책을 세우고 있습니다. 최루탄은 퍼지기 전에 되던지거나 물을 부어버립니다. 요샌 좋은 방독면도 많죠. 추적용 페인트탄도 위에 우비 하나를 덧입었다가 벗어버리면 추적을 피할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 코팅이 된 바이크용 점퍼는 테이저 건의 바늘 촉에 방어력을 줍니다. 서구권에서는 아예 나무 방패를 들고 폭동에 나서는 사람들이 흔하죠. 섬광탄이나 스팅 수류탄의 경우 쌓인 가구나 침대 매트리스 뒤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에게는 위력이 크게 저하됩니다. 이러한 모든 방어책은 새로운 비살상 무기에 대한 수요를 불러오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희한한 무기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시작했거나 미국이 제품화한 것들이 큽니다. 세계 각지에서 각종 과격 시위나 단체와 맞닥뜨리는 미국 입장에서는 압도적인 효과만 있다면 비용 지출은 큰 문제가 아니니까요.



[악취 무기]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악취 액체를 개발해 일본인들에게 사용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는 황인종은 악취가 난다는 인식을 타국인 특히 중립국 외교관들에게 심어주려는 인종차별적인 시도였으며 CIA의 전신인 OSS(전략사무국의 약자)의 제의로 시도되었습니다. 서둘러 출시돼 유리병에 담은 이 액체는 불안정해서 밖으로 자주 샜으며, 목표에 접근하기도 전에 OSS 요원과 주위 사람들만 괴롭히고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60년 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시위대에게 스컹크라는 이름의 비살상 무기를 사용합니다. 스컹크는 노란색 액체이며 물총, 수류탄, 물대포 등으로 발사합니다. 이 무기는 고인 하수구 안에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며, 샤워를 해도 사흘 이상 악취가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다네요. 맞은 사람은 심한 메스꺼움, 구토 및 피부 발진을 겪고, 일부 사람들은 과도한 기침으로 질식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악취를 피해 사람들이 도망을 간 다음, 거리가 비어도 냄새가 빠지지 않고 고스란히 배어 있지만 미국 세인트 루이스 수도 경찰청은 그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는지 업체에서 가장 큰 성과로 내세울 만큼 대량 수입해 무장했습니다.
놀랍게도 최루탄에도 내성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제품명 스컹크도 특정 인종군에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네요. 시장 개척을 위해 다양한 실험을 하던 중 주로 인도인으로 구성된 실험군은 큰 어려움 없이 냄새를 견뎠고, 냄새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액체를 마실 수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못 말리는 악취 액체에는 딱 하나 긍정적인 부분이 있어요. 2017년부터 이스라엘 군은 극우 유대교 원리주의 집단인 하레디 유대인 시위에도 스컹크를 사용한대요.  



[수면 가스]
2002년 10월 발레 공연이 한창이던 모스크바 극장에 체첸인 테러리스트들이 난입합니다. 이들은 인질 900명을 잡고 동료 테러리스트의 석방과 러시아군 체첸 퇴거 같은 협상이 힘든 요구를 제시합니다. 모스크바 극장은 크고 복잡한데다 인질은 너무 많았습니다. 인도주의적 이유로 풀려난 200명의 인질들은 테러리스트들이 몸에 폭탄을 둘렀고, 주 공연장에도 설치했다고 제보합니다. 한마디로 기존의 돌입 작전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러시아 특수부대는 구 러시아 정보국 KGB가 개발한 수면 가스를 극장 옥상 환풍구로 집어넣는 작전을 실시합니다. 이 미지의 수면 가스는 주 성분이 호흡 억제 및 호흡 부전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은 펜타닐 유도체로 추측되었습니다.
작전대로 인질과 테러리스트 모두 잠든다면 최고죠. 하지만 그들은 마취과 의사가 의사 중에서도 고연봉에 속하며 존중받는다는 사실, 수술 사고의 50퍼센트가 전신마취 때 일어난다는 사실을 좀 더 깊이 고려해야 했습니다. 나이, 체질, 건강 상태에 따라 투약량을 바꿔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었죠. 호흡 즉시 전원이 기절하듯 자는 걸 목표했으니까요.
러시아 특수부대는 새벽녘 쓰러진 사람들을 지나쳐 주 공연장으로 침입했습니다. 그들은 가스 마스크를 상시 착용했던 소수의 테러리스트와 조우했고, 전투 끝에 사살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인질들은 신원 확인 차 차가운 극장 바깥 돌바닥에 그대로 방치되었습니다. 의식불명 상태로 호흡이 얕은 사람들에게 10월말 러시아 냉기가 좋을 수 없겠죠. 확인된 이들을 옮긴 곳은 버스였습니다. 평상시면 일반적인 조치였겠지만 기절한 사람들을 들고 나르기도 힘들고, 워낙 서두르느라 차량편이 모자라 몇 십 명은 차곡차곡 쌓는 경우까지 있었다네요. 이 역시 약해진 육체에는 치명적이었습니다. 분산 호송된 인질들을 깨우려고 의사들이 가스 성분을 물었지만 러시아 당국은 군사 기밀이란 이유로 끝끝내 밝히지 않았습니다.
당국의 무책임한 후속 대처는 인질 중 130명이 사망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신경과 호흡기 계통의 장애를 앓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지향성 에너지 무기]
왠지 SF적인 이름이죠? 발사체를 사용하지 않고 목표 방향으로 에너지를 방출하는 무기의 통칭입니다. 이 무기들은 단시간 조준해서 발사하면 치명적이지 않으며 사람 외 차량 같은 기계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럼 SF 같은 이름에, SF 같은 설명, SF 같은 효과를 가진 무기들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펄스 에너지 발사체]
펄스 에너지 발사체(Pulse Energy Projectile) 또는 PEP는 현재 미군이 개발 중인 비살상 지향성 에너지 무기 기술입니다. PEP는 표적에 접촉 시 표면을 일부 증발시키고 소량의 폭발 플라즈마를 생성하는, 보이지 않는 레이저입니다. 이로 인해 대상이 생물일 경우 충격을 받아 기절합니다. PEP는 신경 세포에 영향을 미치는 전자기 방사선을 내뿜으며, 이 방사선 공격은 통증을 유발합니다. 일시적 마비도 불러오죠. 에너지 무기는 출력만 높이면 치명적인데 PEP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초기 프로젝트 이름이 펄스 임펄스 킬 레이저였다니 알 만하죠?
펄스 에너지 발사체는 폭동 제어용이며 최대 2킬로미터 거리에서 작동한다고 합니다. 무게가 230킬로그램이라서 차량 장착용으로 운용될 예정입니다. 기술이 향상되면 휴대용이 될 가능성도 있어요. 레이저 광선총의 탄생이죠.
미국 특별 작전 사령부 2010 회계 연도 계획에는 드론 격추용 버전 개발 작업이 포함되었다고 하니 비살상 무기에서 살상 무기로 바뀌는 건 시간문제 같습니다. 전장에서 쇠와 플라스틱을 효과적으로 박살내는 무기를 사람에게 안 쓸 이유가 없으니까요.
중국은 해당 무기 체계를 실전 배치한 상태이며, 2018년 두바이 국제 보안 무기 전시회 등 각종 행사에서 적극적인 판매 유치를 진행하였습니다. 드론과 소형 항공기를 상대할 수 있으니 중동에서는 많이들 탐낼 것 같아요. 자폭 드론, 박격포 드론이 판을 치니까 말이에요.



[활성 거부 시스템 ADS]
ADS는 강력한 전자기를 방사하여, 물리적 손상은 없는데도 침투당한 피부 속 신경계가 불이 붙은 것 같은 고통을 주는 무기 시스템입니다. 겨냥당한 사람은 1초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칩니다. 온몸이 불타는 느낌을 견딜 수 없으니까요.
2011년 ADS는 지상차량에 장착되어 성공적으로 운영 중이며, 현재는 비행하는 항공기에서 작동 가능하도록 개선하고 있습니다. 항공기 버전은 지상과는 확연히 다른 고도와 속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공군 특수 작전 사령부는 탱크포나 발칸포를 싣고 지역을 장시간 안정적으로 선회하며 쏘는 무장 수송기 AC-130J 고스트 라이더 건십에 ADS를 설치하여 지상의 위협적인 군중이나 개인을 상대하는 방안을 실험하고 있습니다. 길게는 8시간도 빙글빙글 돌면서 살상 무기를 쏘는 무기를 비살상 무기로 전환하는 이득이 많다는 판단이 들었겠죠. 특히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보듯 적군을 죽일 수도, 무사히 내쫓을 수도 있다면 군사적으로는 큰 진전입니다.



[대즐러와 기타 실명 가능 무기]
대즐러(Dazzler)는 강력한 지향성 방사선으로 대상을 일시적으로 눈멀게 만들 수 있는 지향성 에너지 무기입니다. 인간뿐 아니라 기계의 센서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네요. 군사용으로 처음 개발된 이 제품은 안전성을 인정받아 법 집행 및 보안 업무에 사용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무기들은 앞서 보셨듯 출력만 높이면 인간의 눈을 멀게 하는 무기로 전용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영구 실명을 유발하도록 설계된 무기는 1995년 실명 레이저 무기에 관한 유엔 프로토콜에 의해 금지된 상태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영구 실명이 가능한 무기를 생산 및 배치할 능력이 있으나 그러지 않는 것뿐이죠.
국제 여론에 개의치 않는 중국은 이미 비슷한 무기 체계를 개발해 대전차 방어용으로 실전배치하였습니다. 대전차 미사일이 날아오면 그쪽에 레이저를 쏴서 사수의 눈을 즉시 멀게 하는 식입니다. 해당 무기 체계는 북한에도 라이선스 수출돼서 북한의 최신 전차 선군호 등에 탑재되었습니다.
여론에 개의치 않기로는 둘째라면 서러운 러시아 역시 우크라이나 분쟁에서 실명 레이저 무기 체계를 사용했다는 첩보가 있습니다.



[장거리 음향 장치 LRAD]
장거리 음향 장치 LRAD는 장거리에 정상보다 높은 음량으로 경고 메시지를 보내는 스피커 시스템입니다. 지향성 에너지를 이용한 비 살상 병기이므로 조준한 구역에만 엄청난 굉음이나 음성이 들리며, 그 외 주변에서는 이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목표 구역에 있는 군중들은 귀를 틀어막아도 들리는 소음에 도망가게 됩니다.
해당 비살상 무기는 뉴욕 시에서 도입해서 활용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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